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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상에서 두 번째 높은 다리

곡테익 철교(Gokteik Viaduct)는 1899년 세워진,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철교다. 곡테익 협곡을 가로질러 만달레이와 라쇼를 연결하며, 길이 689m, 높이 102m의 위용을 자랑한다.

 

미얀마 여행을 준비하며 꼭 가보고 싶었지만, 사실 출발 전날까지 갈까말까 고민했던 곳이다. 도무지 돌아오는 차편을 확인할 수 없어서다. 짜욱메까지 가서 지나가는 버스를 잡으라던가, 라쇼에서 택시를 타고 피우린으로 가라던가, 나웅펭에서 돌아오는 기차를 타면 된다던가 얘기만 무성하고 확실한 것은 없었다. 12 Go Asia에서는 편도 기차편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엉뚱한 곳에서 노숙을 한다던지 만달레이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이 기회가 아니면 영영 못볼텐데, 에라 모르겠다, 만달레이에서의 둘째날 새벽 중앙역으로 향했다. 가장 환상적이라는 철도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Starless

새벽 3시 반의 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더운 지방인 탓도 있을 것이고, 기차편이 워낙 일찍 출발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양곤역에서 헤맨 경험으로 만달레이역에서는 덜 헤맬 수 있었다. 두어 번 헷갈리고는 기차를 제대로 찾아갔다. 차장이 안보여 기관사에게 물어보고 열차에 올랐다. (그러고보니 양곤에서도 주로 기관사를 괴롭혔었다. 차장도 항상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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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등칸(Upper Class)에는 잘 차려입은 가족이 타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아이 둘은 앞 뒤로 앉아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중절모와 영국식 정장이 근사해서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객차 안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의자, 옷걸이, 선반이 아무래도 익숙해서 자세히 보니 어릴적 타고 다니던 새마을호였다. 기차도 수출했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의자 간격이 새마을호보다 넓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대로였다. 상등칸에 맞도록 안락한 공간을 확보한 거겠지. 이런 식의 시간여행은 예상 밖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열차가 긴 경적을 울리고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얀마에 와서 계속 잠이 부족했는데, 오늘은 더 심했다. 12시 쯤 잠들어서 2시에 일어났으니 잠을 잔 것도 자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창밖 풍경에 눈길을 주다 얼핏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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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밖에 어스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도시의 밤 풍경은 고원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깊은 계곡과 높은 산봉우리 사이로 빛이 영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근사한 풍경이었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굳이 기차를 탄다던 글이 생각났다. 만달레이에서 피우린까지는 택시로 1시간 반이지만, 기차를 타면 4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 풍경을 위해 2시간 반을 희생한다는 얘기였는데, 충분히 납득이 갔다.

 

기차는 몇 개인가의 간이역을 지나 핀우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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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사진을 찍다 돌아보니, 뒤쪽 칸의 승객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돌리니 모두들 쏘옥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니 다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기차에서의 숨바꼭질인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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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풍경 사이를 달려, 기차는 피우린역에 도착했다. 관광지도 있고 외국인들도 많다더니 제법 번화한 역이었다. 노점상도 제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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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 내리기는 귀찮아 행상 아주머니로부터 군것질거리를 샀다. 빵 두개 오백원, 옥수수 하나에 삼백원. 비닐봉지를 옷걸이에 걸어두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걸로 아침과 간식까지 해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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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우린에서 객차 두 량을 더 연결한 기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너른 초원을 지나는데, 철길 양옆으로 무성히 자란 옥수수밭이라던가 바나나밭이 눈에 띄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얼떨결에 나무 이파리에 따귀를 한 대 맞았다. 황당해서 보니 열린 창을 통해 나무가지와 이파리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기차는 마치 예초기라도 되는 양 철길 양쪽의 나무들을 가지치기하며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객차 안은 나무가지와 이파리로 수북해졌다.) 이래서야 졸고 있을 수 없었다. 또 언제 따귀를 맞을 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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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 시간을 달린 기차는 곡테익역에 가까워졌다. 멀리 철교가 보이기 시작하자 기차는 속도를 줄였다. 핀우린역에서 탄 금발아가씨는 어느새 앞자리로 옮겨와있었다. (만달레이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왼편에 앉아야 다리가 잘 보인다.) 열차 안은 묘한 흥분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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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테익 역에서 한동안 멈췄던 기차는 철교로 진입했다. 속도는 더욱 줄어있었다.

 

말이 102m지 몸을 내밀어 바라보니 천길 낭떠러지였다. 사람들은 길게 굽어진 다리와 양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간혹 들리는 셔터소리 외에는 철로와 기차 바퀴가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소음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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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인 풍경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왈칵, 눈물이 났다. 거대한 자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해낸 인간의 위대함 때문이었을까. 풍경이 눈앞에서 흐려졌다.

 

영원할 것 같던 순간이 지나고 기차는 다시 평원으로 들어갔다.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히고 보니, 앞자리의 할머니가 금발 아가씨에게 뭔가 무척 맛있을 것 같은 과자를 먹어보라며 주고 계셨다. 할머니 저도 외국인이에요.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아냐, 별로 맛 없을거야. 맛있을리가 없어. 애써 외면했지만 머리속에 과자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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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나웅펭 역에 도착했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내릴까, 짜욱메까지 일단 가볼까, 잠깐 고민하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역사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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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무원은 만달레이로 가야겠다는 내 얘기를 듣더니 오케이. 표 끊어줄게. 쿨하게 대답했다. 헐. 그렇게 쉬운 거였어? 열차가 언제 있는데? 곧. 정말 너무도 쉽게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니 대체 이렇게 쉬운 걸 왜 다들 모른 거야. 직원이 건넨 표를 들고 12 Go Asia의 바가지에 치를 떨고(어떻게 육천원이나 더 받나?) 플랫폼으로 나가니 댕댕이 하나가 뭐 먹을 것 없냐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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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생수 반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나도 배고픈데, 같이 먹을 것을 찾아볼까? 댕댕이는 별볼일 없는 걸 눈치챈 듯 무심히 플랫폼 저편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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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십오분도 안되어 만달레이행 열차가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타고온 라쇼행 열차가 아직 플랫폼에 남아있었다. 어쩌라고? 고민하고 있으니 만달레이행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라쇼행 열차에 오르더니 반대편 문을 통해 플랫폼에 내리는 것이었다.

 

아하? 그것 참 효율적이네? 나도 무심한 척 라쇼행 열차에 올라 반대편 문으로 내려 철로를 구경하고 다시 만달레이행 열차에 올랐다. 어때? 미얀마 기차를 잘 아는 외국인이지?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찾아가 앉고 보니 이런 센스쟁이, 다시 다리가 잘 보이는 방향의 좌석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만달레이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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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곡테익 철교는 첫번째보다 정도는 덜했지만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조금 더 기억하기 위해서 구석구석 눈에 새겨넣었다.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멀어지는 다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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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은 조금 기운 빠지고, 조금 쓸쓸했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새벽부터 빵 두개, 생수 반 병, 옥수수 한 개 외에는 먹지 못했는데 시간은 어느새 오후 두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피우린역에 도착하면 뭘 좀 사먹어야겠다. 볶음국수가 좋겠네. 그래 볶음국수. 메뉴를 결심하는 동안 기차는 피우린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침에 보이던 행상 아주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역사도 문을 닫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헐, 벌써 퇴근한거야? 주린 배를 움켜잡고 울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금발 젊은이 넷이 다가왔다. 저래도 될까 싶을만큼 짧은 바지와 탑을 입고는 (대부분의 사원과 시설 입구에는 숏팬츠, 탑 출입금지라고 써있다) 기차밖에서 팔을 뻗어 상등칸의 좌석을 꾹꾹 눌러보며 이걸 타도 될까 별로 깨끗하지 않네, 하루 더 묵으며 폭포를 보러갈까? 시끌벅쩍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기어이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아보기까지 하더니 그럭저럭 괜찮네 버스 보다 낫겠네, 떠들며 자꾸 이쪽을 흘끔거렸다. 야, 나도 외국인 맞거든? 니들 말하는 것 다 알아듣는데 미얀마사람일까 아닐까 토론하면 못쓰는 거거든? 짜증을 내려는 찰나 내일 기차 타자고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버렸다.

 

가뜩이나 배도 고픈데 나의 고요하고 영적인 여행을 망쳐버린 녀석들에게 내일 기차 꼭 놓치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배도 고픈데 소리지르면 기운만 빠지지, 참고 말았다. 그나저나 만달레이 도착하면 빨라야 일곱시인데 그 전에 굶어죽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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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창밖도 어두워지고 배고파 잠도 안오니 딱히 할게 없었다. 기운이 없어 그냥 멍하니 있는데, 간이역에서 초딩으로 보이는 꼬맹이들이 단체로 열차에 올랐다. 아마도 학교 다녀오는 것이겠지, 책가방과 도시락을 손에 든 녀석들은 상등칸이건 뭐건 신경 안쓰고 돌아다니다가 나를 발견했다. 지네끼리 쫑알거리더니 한 놈이 다가와 뭘 건네는데 보니 과자였다. 헐. 나 배고픈지 어떻게 알았나? 대단히 고맙네. 자네는 나중에 꼭 큰 인물이 될 걸세. 녀석은 알아듣는지 마는지 쌩긋 웃었다. 이번에는 다른 꼬맹이가 오더니 뭔가 천연 캬라멜 같은 것을 건넸다. 우와, 꽤나 신 맛이었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와하하, 녀석들이 단체로 웃었다. 이 녀석들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가방에서 폴라로이드를 꺼냈다. 남은 필름을 모조리 털어서 몇 장씩 찍어주고, 녀석들 모습도 담으며 노닥거리다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미얀마인들의 ‘베풀라’는 가르침은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다짜고짜 과자를 주지 않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네자 꼬깃꼬깃 용돈을 주려고 하지 않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 시간 쯤 지나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때 녀석들은 하나씩 작별인사를 하더니 우루루 내렸다. 한 놈은 그 사이 정이 들었다고 두번이나 손을 꼭 잡았다. 가슴속에 따뜻한 것이 올라왔다. 녀석들, 잘 지내라. 아이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때까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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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내리고 나니 무척 허전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하릴없이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다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총 17시간의 기차여행, 시간은 일곱시가 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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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내려 어디 맥주 살 곳 없나 가게 몇 곳을 가봤으나 어디에도 맥주는 없었다. 바간의 상점들에는 왠만하면 있었는데, 여기저기 물어봐도 다들 어깨를 으쓱하는데 세 번째 들른 가게 점원이 편의점을 가보라고 알려줬다. 오, 편의점이 있군요, 선생님. 그렇다면 편의점은 어디에 있나요? 점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열심히 가보니, 호텔 바로 앞의 가게였다. 역시 등잔 밑은 어둡고 볼 일이구나. 세 종류의 미얀마 맥주와 과자를 사서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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