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떠난 외국이 네팔이었다.
벌써 10여 년 전,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모집한 자원봉사단에 참여하면서다.
목적지는 카트만두 남쪽의 버디켈로, 카스트 계급상 최하위에 속하는 빠하리족의 거주구역이었다. 굿네이버스는 이 지역에 호스텔과 학교를 세웠고, 70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총 13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이곳에서 영어, 미술, 체육 교육을 진행했고, 영어도서관도 세웠다.
어쩌면 삶의 목표까지 바꾸게 된, 강렬했던 일주일의 기록이다.
한국으로부터 6시간의 비행 후,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버디켈은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낯설고 조금 어색해서 호스텔 입구에 서있는데, 동네 장난꾸러기 녀석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호스텔의 아이들은 고아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모 슬하의 아이, 또는 가정폭력으로부터 구출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밝은 얼굴로 웃어주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왔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수줍어하거나 장난스럽게 웃기 일쑤였는데, 어쨌든 녀석들은 덩치 큰 외국인이 재미있어했다.
매일 아침이면 함께 기상 체조를 했다. 그리고나면 세면과 양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 학교에 가는 일과였다.
네팔 선생님들은 휴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30분의 휴식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휴식시간을 '노는시간'으로 생각하고, 게임을 하거나 뭔가 딴 것을 하는데, 보고 있자니 우리가 휴식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회가 열린 날이다.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조회를 하고 다함께 운동회 준비를 했다.
페이스페인팅도 했다. 동물 분장을 한 녀석들은 나를 '쿠마(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 어릴적 별명을 어떻게 안걸까? 결국 내 이름표에는 쿠마라고 씌여졌고, 네팔에 머무는 내내 사람들은 나를 쿠마라고 불렀다.
선생님의 힘자랑과 매달리기의 콜라보다. 재미있어보이길래 나하고도 하자고 하니, 순식간에 십여명이 달려들어 나를 자빠뜨려 버렸다. 녀석들 말로는 쿠마는 힘이 세야 한단다.
운동회 다음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교복을 입었다. 학교로 출발하기 전 한 컷.
아마 역대 최강의 삼총사가 아닐까 싶었다. 카메라만 보면 들이대던 녀석들은 결국 렌즈에 커다란 손자국을 남겼다.
녀석은 아침기도보다 카메라가 궁금했다.
이 아이는 집안이 넉넉하지 않지만 부모님이 다 계시는 아이 중 하나라고 했다. 부모가 다 계시는게 축복이라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숙녀들.
장난기 가득한 표정들.
우와. 나 잘나왔어.
눈빛, 눈빛.
쿠마가 우리를 노리는 것 같아. 맞아, 조심해야 돼.
모자 멋지죠?
쿠마도 하나 가질래요?
자원봉사를 마칠 때 쯤, 동행했던 한 분이 말했다. 네팔을 품은 사람들을 봐왔는데, 어쩌면 당신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고. 공교롭게도 그 얘기는 사실이 되었다. 네팔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게 되고, 언제라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마음 깊이 간직하게 되었으니까.
다시, 버디켈을 거닐기를 바란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