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익숙해지는데 필요한 시간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여섯시. 한국에서의 기상시간보다 삼십분 빠르지만, 시차를 생각하면 두시간을 더 잔 셈이었다.

 

다행히 머리는 가벼웠다. 간밤에 여기저기 늘어놓은 짐들로 방은 좁아보였다. 이건 캡슐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고개를 저으며 샤워를 하러 갔다. 건물만큼 낡은 총 여섯개의 샤워실과 화장실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샤워실 문의 잠금장치는 헛돌았고 뚫린 천장을 통해 화장실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샤워실에서는 내가, 화장실에서는 누군가가 각자 열중하고 있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제밤에는 몰랐는데 방의 잠금장치도 허술했다. 미닫이문은 잠궈도 세게 당기면 힘없이 열렸다. 이래서야 짐을 다 들고 다녀야 하잖아, 무거운 장비는 두고 다니려고 독실을 선택한 건데, 한숨을 쉬다 마지막 주의 예약을 취소하고 튼튼한 잠금장치를 제공할 것 같은 호텔로 변경한 뒤 아침을 먹으러 갔다.

 

@Starless

아침의 카페테리아는 밤의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는 커피, 분말주스, 바나나, 쌀밥, 토스트, 두 종류의 잼과 버터가 놓여있었다. (잠금장치가 문제라고는 해도) 독실과 에어컨, 샤워, 아침식사까지 제공되는 이 호스텔의 숙박비는 우리돈 칠천원 쯤. 사실 고마워해도 되겠다 싶었다.

 

@Starless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은 커피를 두 잔 마시고, 분말주스도 반 잔을 마시고, 토스트 두 쪽과 바나나를 먹으며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에 카메라샵이 있을까? 스트랩을 사야하거든.

직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도를 펼쳐 술리파고다(대부분의 가이드북에서 ‘술레’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미얀마인들은 ‘술리’라고 발음한다) 동쪽의 거리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봐. 이곳에 전자제품샵이 많아. 아마 슬링도 있을거야.

아, 슬링이라고 하는구나.

하나만 더, 유심은 어디서 사면 좋을까? 
술리로 가는 길에 MPT샵이 있어. 그런데 아직은 안 열었겠다. 8시가 넘어야 할거야.
그렇구나. 고마워.

눈을 반짝이며 미소짓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호텔을 나섰다.

 

@Starless

아침 일곱시 삼십분. 어제밤 택시기사가 차이나타운이라고 알려준 거리는 반쯤 깨어나고 있었다. 시간의 흔적이 밴 공간들, 상흔으로 가득한 벽이 반복되며 여러 갈래의 골목이 나있었다. 천천히 걷자. 아직 시간이 있고,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여행을 떠나면, 어느 곳이라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속에 언어, 화폐, 교통체계, 지리가 들어올 때 쯤 마음은 그곳의 공기, 사람들의 표정에 익숙해져갔다. 그제서야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로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곤 했다.

 

@Starless

 

몇 군데인가 골목을 끝까지 걸었다. 이곳은 공구상 거리. 이곳은 식료품 거리. 노점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Starless
@Starless

인천을 제외하면, 차이나타운은 마닐라에서 가본 것이 다인데 분위기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무엇보다 거리가 보여주는 멜랑콜리가 훨씬 강했다. 자본의 유입이 늦어진 탓이겠지, 조금 더 노후된 듯한 건물들 사이를 걸으며 살짝 한숨지었다.

 

@Starless
@Starless
@Starless
@Starless

오선지에 앉은 음표들.

 

@Starless

MPT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간은 여덟시 십오분. 샵은 이제 막 영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리창은 닦기 전이었고, 크로스배너들이 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직인가. 기웃거리다 입구의 시니어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심을 살 수 있을까요? 이쪽입니다. 카운터에 앉으니 젋은 직원 넷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팸플릿에서 오천원 쯤 하는 4GB 상품을 선택하고 휴대폰을 건네자 능숙하고 빠른 솜씨로 셋업을 마친 폰이 돌아왔다. 네 사람은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그랩을 쓸 수 있겠구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니, 다시 눈을 반짝이며 미소짓는 얼굴들이 돌아왔다.

 

거리는 어느새 눈부신 햇볕으로 가득차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드니, 술리파고다가 눈에 들어왔다.

 

@Starless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번째 파고다  (0) 2021.01.12
양곤의 밤  (0) 2020.12.16
인연의 땅으로  (0) 2020.12.16
천국의 아이들  (0) 2020.12.15
세상에서 두 번째 높은 다리  (0)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