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

슬픔의 시간

책 읽을 시간이 없다보니 정말 깡통이 되어가는게 느껴져서,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익숙한 김영하작가의 ‘책 읽은 시간’을 운전하며 듣는데, 오늘 아침에는 카이로스, 시간과 장소, 브레송, 결정적 순간, 존재와 소멸,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심보선시인의 글이 나왔다.

 

비단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시간 혹은 순간, 존재와 부재, 필멸의 슬픔은 계속 머리속을 떠다니는 주제이다. 좀 더 머리속에 굴려보다 여행을 다녀와야 할까 싶다.

 

@Starless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밤의 덕적도  (0) 2020.12.16
플리커 사진가들  (0) 2020.12.15
Nikon 50mm f/1.8 Series E (1979-1985)  (0)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