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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돌아오지 않는 날들

@RADWIMPS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하나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이 이웃의 토토로일 수도, 모노노케 히메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일 수도 있을텐데, 단순히 좋아하는 걸 떠나서 그 작품을 언제 봤는지, 거기 얽힌 사연은 무엇인지, 왜 그 작품을 좋아하는지, 몇 번이나 봤는지, 이야기를 한보따리 쯤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붉은돼지가 그런 작품이다. 시리도록 푸른 아드리아해, 노을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선, 파시즘에 맞서 산화해간 젊은이들, 돌아오지 못할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 젊은 아가씨의 연정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중년, 서로 총질을 하고 주먹다짐을 하다가도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순해지는 사내들이 나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붉은돼지 말이다. 내가 남자 어른이라는 것 외에는 이런 취향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가끔 고민하기도 했었다. 대체 왜 그렇게 좋아할까. 뭐가 그렇게 좋아서 보고 또 봤을까 하고 말이다.

 

벌써 한달 쯤 전인데, 차세대 하야오라 불리는 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주변의 평이 워낙 좋았고 일본에서는 천칠백만 관객을 넘었다는 얘기까지 있는 터라 기대를 많이 했다. 현란하고 혼란스러운 초반부가 지나고, 전형적인 중반부를 지나 어쩐지 해피엔딩으로 향할 때 쯤부터 – 작품을 본 지인들의 감상과는 다른 종류의 – 감상에 빠졌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세대가 다르다지만 갭이 이렇게까지 컸나 싶었다. 신카이 감독의 작품은, 무엇보다,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무거워질텐데, 그 임계점을 넘을 듯 말 듯 하며 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조금도 허무하지 않았다. 하야오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던 정서 – ‘허무’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고 위선적인 희망을 주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희망의 끝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허무에 반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음악에 빗대어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모더니즘 시대의 음악 – 80년대가 주류였던 Heavy Metal을 전형이라고 본다면 – 당시의 음악들은 일단 심각하고, 뭔가 의지를 밀어붙여야 하고, 그래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식이었다. 따지고 보면, 음악 뿐 아니라 영화도 정치도 철학도 심지어 사랑도 그랬던 것 같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말로 대변되는 그것 말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음악들은 – 이전 세대가 죽도록 투쟁하며 희망을 말했다면 – 희망의 좌절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기본적으로 비관적이었고 허무하고 자조적이었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얘기조차 필요 없는 현재의 음악은 한걸음 더 나아가 “결론 따위는 알 수 없다!”를 외치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일면 이해가 가는 것은, 어떠한 노력들도, 거대한 담론들도 모조리 실패로 판명되었고, 그 와중에 쏟아부은 피와 눈물은 모두 헛것이 되었고, 그 헛것을 보고 자라난 세대가 현재의 세대일테니까.

 

최근의 음악들을 들을 때면, 반복을 통해 말초신경을 자극하지만 사실 어떤 목적도 결론도 추구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과정이고 결론이고, 시간의 흐름 따위는 상관 없이 그저 현재에만 충실하자는 투로 들린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회 전반에서 이뤄졌을테니, 영화판의 상황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신카이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꼈던 불편함은 아마도, 하야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작법과 화법 – 반복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지만, 사실 어떤 목적도 결론도 추구하지 않는 – 에 대한 당황스러움이었거나, 해피엔딩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고 삶과 인연은 단선적이지 않으니 행운을 기다려보자는 제안에 대한 반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낯설었고 좀 어색했고 좀 거북했을 것이다. 참 다르구나, 이런 입장에 현재의 세대가 열광한다면, 이미 내가 알던 시대는 지나버렸구나, 하는 아쉬움도 느꼈을 것이다.

 

과거가 되어버린 시대에 대한 단서들은 사방에 존재한다.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자본론은 폐기되었다. 세기를 좌우했던 거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뮤직씬에는 더 이상 디바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분야에도 절대강자도, 절대선도 없으며, 선과 악의 대결 구도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전쟁은 실행력을 가지지 못한 채 텐션 유지 장치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과거의 가치, 그 시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 시절 아름다웠던 것들, 그 시절 가슴 뛰게 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폐허가 되어가는 백사마을의 예가 아니어도, 우리의 일상을 채우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사라져버렸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하지만, 변화는 사실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자.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지나버린 시대’를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라고 바꿔부르면서 조금은 죄책감을 줄여보자.

 

우선, ‘하야오의 시대’를 ‘하야오의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라고 바꿔 불러보자. 그리고, ‘하야오의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기억하는 그림 한 장을 들여다보자.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난장판이 되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술에 취하면 습관처럼 울던 후배, 이 자식아, 너 술 그렇게 밖에 못먹어?라며 다그치던 선배, 고래고래 노래 부르던 동기, 틈만 나면 여자들에게 수작을 걸던 녀석,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조심조심 눈길을 교환하던 어느 비밀 커플을 떠올려보자. 그 장면 속에 당신이,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면, 그날을 그리워해보자. 2017년의 ‘너의 이름은’을 보고 ‘하야오의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그리워하는 제법 꼰대스러운 감상을 누려보자.

 

@STUDIO GHIBLI

신카이 감독의 성공을 기화로, 일본 애니메이션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화의 방향이 어느 쪽이 될지는 모르지만, 뭐, 적어도, 우리가 사랑한 하야오와 지브리의 유산을 이어받는 쪽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무겁고, 너무 허무하니까. 그렇게 무겁고 허무한 기억들은 지금의 시대에는 맞지 않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기억하고 싶다. 가끔은 붉은돼지를 보면서, 가끔은 토토로의 엔딩을 보면서 눈물 한방울 떨구고 싶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소중한 그날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래야 조금은 덜 쓸쓸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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