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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상이라는 상처

@BLEECKER STREET

일상은 지루하다. 그래서, 이벤트 없는 일상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패터슨(PATERSON)'을 보고난 후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지 않는 것도, 어느 순간 이게 영화 속 어느 날이었는지 지난달 나의 하루였는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도, 그게 주인공이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던 풍경이었는지 어제 내가 본 차창 밖 풍경이었는지 알 수 없어져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영화는 일주일을 - 아침으로부터 밤까지 - 그저 보여주는 식이다. 월요일, 화요일, ... 시간은 흐르고 카메라는 기계적으로 정면, 혹은 측면에서 주인공을 관조한다. 주인공은 매일 침대에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고, 와이프에게 애정표현을 하(거나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리얼을 먹고, 출근하고, 차에 올라 취미인 시(詩)를 끄적이고, 배차원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버스를 운전하고, 승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차창 밖 풍경을 보고, 점심을 먹고, 시를 쓰고, 다시 버스를 운전하고, 승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차창 밖 풍경을 보고, 버스를 주차장에 대고, 퇴근을 하고, 집 앞 우편함을 바로 세우고, 와이프의 하루를 듣고/보고/칭찬하고, 개와 산책을 하고, 개를 단골 술집 앞에 묶어두고, 바텐더와 얘기를 나누고, (주인공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인공의 일상에 뛰어든) 이웃들의 일상에 관여하고,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잔다. 그러면서 일상의 시간의 흐름과, 늘 같아보이지만 늘 다른 관계들, 일상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균열들을, 문득 문득 보여준다.

 

사실 화요일의 이야기 정도까지는 주인공의 그 이상한 시 - 아마도 언어의 갭에서 오는, 혹은 영문학에 대한 완전한 무지로 인한 몰이해인 것 같지만 - 를 읽으며, 이 속에 무슨 메타포를 숨겼을까 고민했었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라 시 외에는 아무것도 들여다볼 게 없는 것 같았다. 수요일 쯤에는 살짝 졸았다. 아, 이건 너무 지루하잖아. 차라리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이 나았던 것 같아. 그건 최소한 옴니버스 아니었나. 그렇게 반쯤 의자에 파묻혀 있다가, 목요일에 갑자기  "이게 그렇게 편안한 얘기던가?"라고 묻는 듯한 주인공의 얼굴을 마주해버렸다.

 

주인공의 일상에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끼어든다. 개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번거롭게 루틴을 바꾸기 싫은 주인공은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결혼생활의 근간을 되묻는 듯한 이웃 커플의 사건, 문제될 게 없던 휴대폰의 부재가 만든 작은 불편함과 두려움, 처음부터 존재하기는 했었는지 의심스러운 '내' 공간에 대한 반복적인 침해, 나와는 '별' 관계없이 살아가는 나의 와이프, 그리고 두근거리는 기쁜 소식도 잠시, 수년 동안 써온 원고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이 이어지는 동안, 그저 무표정한 줄 알았던 주인공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져간다.

영화는, 일상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언제라도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과, 그런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살아가는 사람의 항상성에 대한 의지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주인공은 잽처럼 날아드는 상처를 흘려보내는게 아니라 그대로 두들겨 맞으며 쓰러지고 싶은 욕망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일상의 무게를 슬금슬금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다가 어느 순간 어깨를 짓누르면서, 그렇지, 사실 모든 것이 상처였지, 그렇지 않은가? 되묻는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일을 시작하기 전), 점심 먹고 잠시 짬을 내서, 퇴근 후 골방에 박혀서 시를 쓰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출근길의 풍경을, 때로는 점심시간과 퇴근 후의 거리를,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카메라로 바라보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습과 닮았다. 사실, 어딘가에서 혼자 악기를 만지작거리거나,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수많은 아마추어 예술가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취미'라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마도 스스로를 치유하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탈출구일 수 있겠다. 그런 공감이 생겨서였을까, 주인공의 원고가 사라졌을 때의 망연자실한 상황에서도 그랬지만, 그동안 수고했다, 황망하겠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제 자신을 조금 더 위하라며 노트가 건네지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일상은 상처투성이고,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견뎌내는 과정이다. 견뎌내기 위해 (영화의 주인공처럼) 시를 쓰던, 카메라를 들고 삶을 관조하던, 일상이 그리워지도록 여행을 떠나던, 그 모든 행위의 끝자락에서 다시 일상을 견뎌내고 다시 살아내고 있는 당신께 이 글을 드린다. 그런 당신이라면, '패터슨'을 좋아할 것 같다는 얘기도 속닥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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