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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번째 파고다

여행을 떠나면 유독 종교시설에 집착한다.

 

교토에 가면 꼭 료안지에 들러야 한다. 마닐라에서는 주말마다 에르미타교회를 기웃거리다가 동료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다(에르미타교회는 악명 높은 우범지대의 한가운데에 있다.) 포르투에서는 성당에 정신이 팔려 옆길로 새기 일쑤였고,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미사에 갔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성당이란 성당은 다 찾아다녔고, 박타푸르와 우붓에서는 새벽부터 힌두사원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안갔었네 생각하다보니, 그럼 그렇지, 예원을 세바퀴 쯤 돌았었다.

 

종교시설에 집착하는 것은, 신을 모신 곳이야말로 사람들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서다. 여러 사원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은 순수 그 자체였고, 그 절실함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시설만큼 그 곳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곳이 있을까 싶다.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대로 흔적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미얀마는 내게 노다지같은 곳이었다. ‘천개의 불탑’ 바간이 아니어도 구글맵을 통해 본 미얀마 전역은 온통 사원과 파고다가 넘쳐났다. 

 

양곤에서 가장 유명한 파고다는 단연 슈웨다곤이다. 그 거대한 크기와 화려한 자태, 끊임 없는 참배객들의 모습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 새벽에 가서 해뜨는 걸 볼까, 오후에 가서 해지는 걸 볼까. 그냥 하루를 온전히 슈웨다곤에서 보낼까, 어쨌든 가장 마지막에 가야지, 아껴둬야지,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미얀마에서의 첫번째 파고다는 술리가 되었다.

 

술리는 슈웨다곤보다 2,500년 먼저 세워졌다고 한다. 미얀마인들은 술리를 양곤의 심장이라 부르는데, 술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잇는 번화한 거리가 조성되었고, 북으로는 양곤중앙역과 보족 아웅산 시장, 남으로는 양곤강 선착장이 위치한 만큼 그야말로 중심이 맞겠다. 술리는 1988년의 민중항쟁, 2007년의 반정부시위의 거점이기도 했단다. 명실상부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다.

 

MPT샵을 나와 큰길을 따라가니 머지 않은 곳에 술리가 보였다. 명성에 비해서는 크지 않은 규모, 조금은 낡아보이는 외관에 고개를 갸웃하며 육교를 건넜다.

 

생각보다 좁은 출입구가 나왔다. 미얀마의 사원들은 동, 서, 남, 북 네방향으로 드나들 수 있는데, 내가 들어간 곳은 남쪽문이었다. 많은 상점들이 위치한 곳은 동쪽문인 것 같았다.

 

입구의 표지판에는 탑 차림 불가, 핫팬츠 금지, 신발 벗으시오 등 이러저러한 금지사항들이 써있었다. 반바지가 안된다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가, 론지1)를 입지 않아도 되는건가. 느긋한 기분으로 들어서니 입구의 젊은 아가씨가 ‘외국인은 티켓을 구입해야 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내밀었다. 아, 말로만 듣던 외국인 요금인가, 생각하며 돈을 지불하자 1회권 티켓이 건네져왔다. 매번 들어갈때마다 사라는 거군. 아가씨는 내 신발을 보더니 자기가 맡아주겠다며 한쪽에 두라고 했다. 고마워요. 한쪽으로 밀어두고 경내로 들어갔다.

 

처음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황금 파고다를 중심으로 수많은 부처와 신상들이 모셔져있었다. 가루다와 나가, 하누만 등 힌두의 신들도 보였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 위치한 당에는 세속적인 이미지의 부처가 모셔져있었는데, 광이라도 낸 것 같은 금빛에 네온사인 장식을 볼 수 있었다. 목에는 염주로부터 실과 꽃까지 - 정말 온갖 것들이 걸려있었고, 부처 앞에는 불전함이 놓여있었다. 흔히 ‘사원’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라기보다 우리의 서낭당이나 법당에 가까워보였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이 실내에 익숙해질 즈음 사람들의 독경소리, 절을 하며 나는 규칙적인 소리, 들어오고 물러나는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야옹, 울음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났다. 예를 올리던 중년의 남자는 가방에서 밥을 꺼내 고양이에게 나눠줬다. 남자는 다시 예를 올리기 시작했고 얌전히 밥을 다 먹은 고양이는 남자의 옆에 앉아 부처를 바라봤다.

너도 경배하는거니.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니 골골 소리가 들려왔다. 

부처 앞에서 밥을 나누고 부처를 바라보는 모습은 생경하면서 뭉클했다. 경건함보다는 나눔을 선택하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황금의 나라’답게 부처도, 신상들도, 여러 장식들도 화려한 금으로 장식되어있었지만, 사진으로 보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차라리 소박하고 촌스럽게 느껴졌는데, 그래서일까, 종교시설보다는 일상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인들에게 종교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어느새 날이 화창하게 개고 있었다. 신발을 찾고, 술리를 떠났다.

 

각주 1) 론지는 미얀마인들이 입고다니는 일종의 치마다. 남녀 모두 입는데, 아래 위 폭이 같은 치마에 몸을 집어넣고 양쪽을 당겨 묶고 다닌다. 발리의 사롱처럼 커다란 천을 옷 위에 두르는 형태와는 다르다. 재질도 훨씬 두툼해서 사원에 갈때 뿐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많이 입는다. 혹자는 론지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게 예법이라고 하던데, 미얀마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불편해서 어떻게 다니겠냐고 와하하, 웃었다. 본래는 어땠는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속옷을 입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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